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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오드리 헵번 남편들 봉사 사진 나이 자녀 아들 사망원인

yikg57 2022. 11. 15. 10:46

- 프로필 이력 경력

본명 이름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
Audrey Kathleen Ruston

출생 나이 생일
1929년 5월 4일
고향 출생지
벨기에 브뤼셀 익셀

사망일
1993년 1월 20일 (향년 63세)
스위스 보 톨로셰나

국적
영국
신체 키
170cm

가족관계
배우자 멜 페러 (1954년~1968년; 이혼)
배우자 안드레아 도티 (1969년~1982년; 이혼)
동거인 로버트 월더스 (1980년~1993년)
아들 션 헵번 페러 (1960년생)
아들 루카 안드레아 도티 (1970년생)

직업
배우, 자선사업가
활동
1948년 ~ 1989년

종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 무종교

슬프게도 사생활은 타 할리우드 스타들과 비슷하게 암울했다. 첫 결혼 전 약혼했던 제임스 핸슨이라는 연인이 있었으나 헵번이 로마의 휴일을 찍으면서 스케줄이 바빠지자 헤어졌다. 당시 헵번은 로마의 휴일을 찍는 한편 약혼을 동시에 준비하면서, 자신이 직업과 결혼생활을 동시에 할 수 있을지를 엄청 고민했다고한답니다.


사브리나 영화 촬영 도중 주연인 윌리엄 홀든과 연애를 했다가 영화 개봉 후 헤어진다. 이후 헵번은 미국 배우인 유부남 멜 퍼러 (Mel Ferrer)와 사귀게 되는데, 멜 퍼러는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헵번도 인정할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지만, 헵번을 구워 삶았다. 결국 1954년 멜 퍼러는 세 번째 와이프를 버리고 오드리 헵번과 네 번째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은 아무리봐도 헵번이 아깝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최전성기의 탑 여배우가 한물간데다가 돈도 별로 없고 사회적 평판도 바닥이었으며 사생활도 3번이나 이혼했을 정도로 엉망인 배우랑 결혼하는 것이었답니다.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장났는데, 오드리 헵번은 다른 거장 감독들이 제안한 캐스팅을 거절하고 남편인 멜 퍼러가 감독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멜 퍼러는 결혼 생활 와중에도 자신의 바람기와 오드리 헵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헵번과 잦은 다툼을 했고 헵번이 첫번째 임신 중 언포기븐 촬영을 하다가 낙마사고를 당해서 유산한 이후 잦은 유산을 하게되자 결혼 생활 말년에는 헵번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결국 참다못한 헵번은 1968년 퍼러와 이혼한다. 이후 헵번은 멜 퍼러를 피한 것은 물론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멜 퍼러는 헵번과 이혼 후 다른 여자와 5번째로 결혼했고 장수하다가 2008년 만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답니다.

1969년,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부터 "나는 오드리 헵번과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라고 말하며 오드리 헵번을 따라다니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와 재혼하는데, 재혼시 나이가 만 39세였는데도 불구하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25] 그러나 전성기 시절 헵번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했던 안드레아 도티는 중년이 된 헵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도를 하기 시작했고[26] 결국, 오드리와 결혼한지 13년만에 이혼했다. 그래도 오드리는 도티와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고 한다. 결혼 기간 동안 20년 가까이 이탈리아에서 거주했고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영화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가족의 초상' 캐스팅 제안도 들어왔으나 부도덕한 역이라고 거절했다고 한답니다.

도티와 이혼 후 헵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되고 구호 활동시기에 네덜란드 배우인 로버트 월더를 만나서 1993년 사망할 때 까지 동거했다.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런 활동에서 미소짓는 노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해졌고,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답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경험이 자선사업 활동을 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도 한때 전쟁 난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은퇴 이후에도 자선사업가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1993년 1월 20일 결장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3세였습니다.

오드리 헵번 전남편 멜 페러 사망
- 2008. 6. 4

오드리 헵번(1929~1993)의 첫 남편이었던 미국 배우 겸 감독 멜 페러가 3일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3일 로이터, AP에 따르면 페러 가족의 대변인인 마이크 메나는 페러가 1일 캘리포니아주 카펜테리아의 가족 농장에서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밝혔습니다.

뉴저지주 엘버런에서 푸에르토리코 출신 의사인 아버지와 사교계 명사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갔다.

2학년 때 극본상을 받은 페러는 대학을 중퇴하고 멕시코와 뉴욕에서 작가 및 편집자로 일했으며 1938년 코러스 댄서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처음 선 뒤 연기를 시작했ㄷ바니다.

본격적인 영화 배우의 길로 들어선 작품은 1949년 '잃어버린 경계선'이며 대중에게 가장 널리 이름을 알린 영화는 1953년 '릴리'였다.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로 큰 성공을 거둔 헵번과 페러는 뉴욕에서 연극 '물의 요정'에 함께 출연했던 인연으로 1954년 결혼했답니다.

1956년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나타샤역을 맡았던 헵번과 청년 공작 안드레이 역을 맡았던 페러가 함께 춤을 추던 일명 '나타샤 왈츠' 장면은 올드 팬들의 기억에 박힌 명장면으로 꼽힌다.

감독으로서 1950년 '은밀한 분노'를 연출한 페러는 1959년 헵번을 기용해 베네수엘라에서 '그린 맨션'을 찍었다. 이들의 호흡이 가장 잘 맞았던 영화는 1967년 스릴러 영화 '어두워질 때까지'로, 페러는 제작을 맡았고 헵번은 눈먼 여자 주인공으로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줬다.

이들은 1968년 이혼했다. 페러에게 헵번은 세 번째 아내였으며 둘 사이의 아들인 숀 헵번(47)은 현재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페러는 헵번과 이혼한 뒤 1971년 엘리자베스 소코틴과 결혼해 여생을 함께했답니다.

오드리 헵번, 염문설까지 났던 남성은 누구? 지방시와 진한 우정 지내
- 2021. 11. 28

11월 28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배우 오드리 헵번과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의 우정이 그려졌다.

배우 오드리 헵번은 1953년 데뷔작 '로마의 휴일' 촬영 후 차기작 '사브리나'에 캐스팅됐다. 당시 출연 배우들은 영화사 소속 디자이너가 모든 의상을 담당했으나 오드리 헵번은 이례적으로 시스템에 반발하며 거장 빌리 와일더 감독을 설득했답니다.

오드리 헵번이 선택한 디자이너는 위베르 드 지방시였다. 1951년 쿠튀르 하우스 오픈 이후 첫 컬렉션을 선보였던 위베르 드 지방시는 당시 신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단계였다. 지방시는 "미스 헵번이 찾아간다"는 영화사의 연락을 배우 캐서린 헵번으로 착각, 신인 배우였던 오드리 헵번이 방문하자 협찬을 거절했다.

이에 오드리 헵번은 직접 지방시를 저녁식사에 초대해 자신의 마른 몸매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내밀어 그를 설득했다. 결국 오드리 헵번 열정에 반한 지방시는 협찬을 수락했고, 이는 할리우드 역사상 최초의 브랜드 의상 협찬이 됐다.

마침내 지방시가 함께한 영화 '사브리나'가 제2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영화 크레디트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지방시는 모든 영광을 영화사 소속 디자이너 에디스 헤드에게 빼앗겼다.


이를 본 오드리 헵번은 지방시에게 향후 자신의 모든 영화 의상 담당을 제안, 출연 계약서에 지방시의 의상만을 입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후 두 사람은 '사브리나'에 이어 영화 '퍼니 페이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호흡을 맞추며 '헵번 룩'을 유행시켰답니다.

일각에선 두 사람을 둘러싼 염문설도 제기됐음에도 오드리 헵번과 지방시는 우정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2년 오드리 헵번이 결장암에 걸렸다. 지방시는 오드리 헵번을 위해 생명 유지 장치가 달린 전용기를 만들어 스위스까지 동행해 그가 사망한 1993년 1월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지방시는 오드리 헵번의 재산 집행인이었고, 관을 직접 운구하는 등 끝까지 곁을 지켰다. 이어 지방시는 2018년 9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오드리 헵번이 선물한 코트를 소장하는 등 평생을 함께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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