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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 나이 아들 딸 부인 아내 결혼 와이프 임봉교 프로필 재산 방조명

yikg57 2022. 9. 2. 20:28

성룡이 번호 물었다는 中 승무원, 인생 역전했나
- 2022.08.24

비행기에서 만난 배우 성룡 일화를 공개했다 논란을 낳았던 중국 승무원의 근황이 전해졌다.


슈이디궈궈라는 닉네임의 중국 남방항공 승무원은 당시 성룡이 자신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인증샷을 SNS에 게재하며 "사진도 찍고 내게 주소와 전화번호를 달라며 선물을 보내주신다고 했다"는 글을 더했답니다. 

해당 글은 예상 밖 파장을 몰고 왔다.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성룡이 미모의 승무원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봤다는 부분이 문제가 된 것. 당시 이 게시물에는 성룡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는 의미를 담은 네티즌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이후 이 승무원은 성룡이 자신의 자서전을 선물하려 주소와 번호를 물어본 것이라며 자서전 사진과 함께 해명의 글을 올렸지만 비난은 계속됐고, 승무원은 관련 글을 삭제한 뒤 SNS 활동을 중단했답니다.

약 5개월이 지난 현재 슈이디궈궈는 SNS 활동을 재개하고 근황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예전과 부쩍 달라진 분위기가 네티즌에 포착돼 이목을 끌고 있다. 근황 속 슈이디궈궈의 스타일이 화려해졌다는 것. 화려한 성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올라오자 네티즌들은 성룡 사건으로 그의 몸값이 올라간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다. 

한편 성룡은 1982년 임봉교와 결혼해 그해 아들 방조명을 얻었으며, 내연녀였던 홍콩 배우 오기리(우치리)와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 딸 1999년생 오탁림(우줘린)을 뒀다.

성룡 재산공개, 부인 임봉교가 도맡아 관리 중
- 2011.08.10

배우 성룡의 재산공개와 더불어 모든 재산이 부인 임봉교에 의해 관리되고 있음이 알려져 화제다.

지난 8일 중국의 한 매체는 포브스의 보도를 인용해 성룡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그 규모가 20억 위안(한화 1조 5천억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이 매체는 보도를 통해 성룡이 부인 임봉교에게 약 1조 5천억원 규모의 재산관리를 모두 맡기고 있다면서 '아마도 성룡조차 자신의 재산규모를 잘 알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답니다.

성룡의 부인이자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임봉교는 현재 성룡이 창립한 JC그룹의 대표이사 겸 비서직을 맡은 후 모든 재산을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다.

더욱이 성룡은 과거에 출연한 영화의 저작권료와 대만과 홍콩 외 베이징, 미국, 호주 등지에 고가의 부동산 또한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임봉교가 관리하는 재산의 규모는 알려진 것보다 더욱 큰 규모일 것으로 보인답니다.

- 프로필 이력 경력

본명 이름은?
房仕龍(Fǎng Shìlóng, 팡스룽)

출생 나이 생일
1954년 4월 7일 (68세)
영국령 홍콩 빅토리아 피크

국적
영국령 홍콩
신체 키 혈액형
172cm, 75kg, AB형

가족관계
아버지: 방도룡(1914. 12. 18.~2008. 02. 26.)
어머니: 진리리(1916.~2002. 02. 28.)
아내: 임봉교(1953. 06. 30.~ ) (1982 결혼)
아들: 방조명(1982. 12. 03.~ )
딸: 오탁림(1999. 11. 19.~ )

학력
홍콩 공연예술학교 드라마학과
데뷔
1962년 영화 '대소황천패'

종교
개신교
언어
광동어, 표준중국어, 영어, 한국어

-  생애
- 과거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방도룡(房道龍, 1914 ~ 2008)이라는 사람인데, 본래 안후이성 우후(蕪湖)시 출신으로 중국 국민당의 비밀경찰이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은 성룡에게 복잡한 가족사를 갖게 했는데, 이 사실을 모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말해주었고, 자신의 성이 방씨라는 것과 안후이성에 이복형 2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다룬 개인적 영화로 용의 흔적: 성룡과 그의 잊혀진 가족이 있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보낸 인물로, 집안이 가난한 탓에 정규교육조차 받지 못해 문맹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성룡은 학교에 입학한 이후 계속 장난을 치다가 초등학교 1학년 무렵 퇴학을 당하게 되었고, 성룡의 아버지가 취업문제로 호주로 출국하게 되면서 우점원의 희극학교로 10년간 계약관계로 입학을 하게 되어 자연히 문맹이 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룡의 어머니도 3년 후 남편을 따라 호주로 떠나게 되면서 혼자서 생활하게 되었고 배움의 기회를 잃어 문맹이 된 그는 대본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동료가 대신 읽어준 대사를 외워 연기를 하는 등 많은 고난을 겪었답니다

1980년대에 성룡이 대스타가 된 이후에도 이것이 걸림돌이 되어, 자신은 사인회에서 팬의 이름을 직접 써주지 못하는 것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부인 임봉교는 성룡에게 대본을 읽어주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그 후에 문맹에서 벗어났고, 영어와 표준중국어도 구사할 수 있다.

양친이 모두 오스트레일리아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고, 혼자 남겨진 성룡은 우점원(于占元) 희극학교(경극학교)에 들어가 10년 동안 연기와 무술 훈련을 받는다. 이때의 훈련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성룡은 일찍이 고문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7] 성룡은 10년간 학교를 다니기를 원해 입학하게 되었으나 입학 초기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희극학교에 입학할 당시 성룡의 아버지와 우점원 사이에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1년, 3년, 10년간 희극학교의 소속으로 사망하더라도 학교측에서 일체의 배상책임이 없다는 계약을 했다고 한다. 이 우점원 희극학교 4년 선배가 홍금보고, 4년 후배가 원표였는데, 이들은 훗날 '칠소복'으로 이름을 떨친다. 1988년에 제작된 유가위 감독에 홍금보가 주연한 영화 《칠소복》이 바로 이 시절을 그려낸 영화다. 우점원(于占元)의 이름 끝 글자 원(元)을 성으로 삼아 이름을 만들었으며, 이 시절 홍금보는 '원룡', 성룡은 '원루'란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후 독립하면서 각자의 이름을 만들게 된다. 홍금보나 성룡과는 달리 원표, 원덕, 원태 등은 그 시절 그대로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 스턴트맨 시절

희극 학교를 졸업한 성룡은 1971년 겨우 17살[8] 나이에 난데없이 영화 주연으로 나왔다. 그러나, 한참동안 이 항목에서도 거론도 안되었고 성룡 본인도 부끄러워할 정도로 엄청난 허접 영화였으며 2년이나 개봉도 못한 영화 광동소노호 (廣東小老虎, 1971)였다. 이 영화감독인 위해봉은 촬영감독도 맡았는데 그가 촬영감독을 맡은 영화 기린장은 이소룡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이소룡이 어릴적부터 친구이던 이 영화 주연배우 소기린을 위하여 도운 것을 무단으로 영상으로 써먹는 짓을 해먹고 광동소노호 못지않은 허접 영화로 소기린은 듣보잡 조연배우나 활동하다가 1987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리고, 성룡이 취권 대박으로 알려지자 부랴부랴 1979년 금흠 감독에 의해 조수괴초(刁手怪招) 라는 제목으로 재편집했는데 이게 참.....이젠 대스타가 되어버린 성룡을 쓸 수 없으니 다른 대역을 무술 실전 체험이라며 눈을 가리고 얼굴을 가리며 싸우게 하는 투로 재촬영하여 섞여놓았던 괴작으로 한국에서 1989년 취권 개봉 10주년이라며 개봉해 욕만 쳐먹었다. 당시 영화월간지 로드쇼의 독자 감상란에 대역을 성룡이라고 나오게 하는 씬이 참 허접이고 성룡 아니라는 거 다 드러났다라고 엄청 분노어린 악평을 할 정도였다. 2007년에 미국에서 DVD가 나왔답니다.

아무튼 첫 데뷔작 광동소노호는 개봉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성룡은 선배인 홍금보의 추천으로, 이소룡 영화 《정무문》과 《용쟁호투》에서 스턴트맨으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정무문》에서는 이소룡에게 맞고 날아가서 죽는 최종보스인 일본인 관장의 스턴트를 했었는데, 당시 한 사람이 장비없이 날아간 거리로는 최고였고, 《용쟁호투》에서는 이소룡에게 맞는 장면(극중 이소룡에게 4개의 장면에 걸쳐 등장하는데, 목이 꺾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나온 뒤에 장봉에 맞고, 이후 다른 장면에서 단봉에 맞고 물에 빠진다.)에서 이소룡의 실수로 인해 너무 세게 맞는 바람에 성룡이 부상을 입자, 이소룡이 사과의 의미로서 조연이라도 성룡을 꼭 다음 영화에 출연시켜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을 정도로 성룡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스턴트맨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그러나 《용쟁호투》를 완성한 직후에 이소룡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성룡은 홍콩과 한국을 오가면서 여러 편의 무협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연기하면서 연기자의 길에 나서게 된다. 이때 성룡은 그야말로 온갖 엑스트라 및 조연을 맡았는데, 심지어 에로틱 영화인 《금병매》(1974), 《花飛滿城春(화비만성춘)》(1975)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베드씬을 찍기도 했다. 이 당시에 출연한 《여경찰(女警察:영어 제목은 Police Woman)》 같은 경우는 훗날 국내에서 《성룡의 영 타이거》라는 제목을 붙여 비디오로 출시되었는데, 이 제목은 일본에서 토에이가 《ジャッキー・チェンのヤングタイガー》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발매한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미국에서는 《Rumble in Hong Kong》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다. 이외에도 The Heroine, Here Come Big Brother(...)등 여러 제목으로 개봉하였습니다

제목도 그렇고 마치 성룡이 주연인 양 포장된 탓에 멋모르고 빌려보던 이들이 성룡이 얼굴에 점을 붙이고 찌질이 악당 졸개로 나와 주인공인 택시기사(배우는 대만 출신 배우인 진상림(秦祥林, 친샹린) 1948~ )에게 맞아 뻗는 모습에 놀라는 추억을 겪기도 했다

결국, 배우로서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성룡은 일을 접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게 된다. 그러나 1년이 채 안되어, 이소룡의 홍콩 영화 데뷔작인 《당산대형》과 《정무문》의 감독 나유(羅維, 뤄웨이) 감독이 《정무문》 촬영 중, 이소룡과 불화가 생긴 이래로 이소룡을 대체할 만한 배우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턴트맨이 아닌 주연으로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홍콩으로 돌아온다. 오디션에 합격한 성룡은 나유와 함께 《신정무문》부터 전형적인 이소룡식의 비장미와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작품에 줄기차게 출연하기 시작한다. 성룡이란 예명도 새끼 용(소룡)을 뛰어넘는 어른 용(성룡)이 되라는 뜻으로 나유가 지어준 것이랍니다.

1977년작, 《풍우쌍류성》(한국 제목 : 유성검의 대결) 때부터는 쌍꺼풀 수술을 한 뒤라 외모도 배우로서 손색없는 호남형으로 바뀐다. 하지만 당시 쿵후 영화는 그야말로 '마구 찍어낸 공장제 쌈마이 영화'였고, 특히 나유와 노예계약에 가까운 조건으로 고만고만한 영화를 찍던 성룡은 회의를 품으면서 점차 나유와 사이가 벌어진답니다.

- 코믹 무술 영화로 성공

그러던 와중에 성룡의 커리어를 역전시킨 일이 발생한다. 1978년 당시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서구형의 외모에 개구장이 + 훈남 인상으로 홍콩에서 대스타였던 배우 부성(傅聲)이 스케줄 문제로 원화평 감독의 《사형도수》(1978) 주연에서 하차하자, 나유가 원화평과 오사원에 대한 의리로 사원영화사에 성룡을 잠시 대여해 준 것(…). 《사형도수》(1978)가 히트하자 원화평은 곧장 《취권》(1978)의 제작에 들어갔고 이 작품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성룡의 인지도는 수직상승하게 된다. 참고로 취권으로 뜨기 전의 성룡은 진지한 역 쪽이었다. 코믹 이미지로 성공한 다음에도 《화소도》(1990), 《중안조》(1993), 《뉴 폴리스 스토리》(2004), 《신주쿠 사건》(2009), 《더 포리너》(2017)등 나름 꾸준하게 진지한 캐릭터와 내용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나유와 계속 영화를 찍다가는 평생 소모품으로 살다가 끝나리란 절망감에 빠져있던 성룡은 《취권》이 성공하자 몰래 대한민국으로 야반도주를 하려다가[18] 나유의 부인 유량화에게 들키게 된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량화가 '그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성룡에게 물었고, 성룡은 이에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유는 성룡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고, 마침내 성룡의 첫 감독작인 《소권괴초》(1979)가 제작된다. 《소권괴초》에서 그는 《취권》과 마찬가지로 코믹을 가미한 액션을 내세웠고,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린답니다

그러나 이때, 성룡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 나이여서 그랬는지 큰 실수를 저지른다. 나유 감독과의 계약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영화사의 계약서에 서명을 해버린 것이다. 비록 몰랐다고는 해도 분명히 잘못이긴 했다. 이에 두 영화사는 성룡을 사이에 놓고 대립했고, 관련된 삼합회까지 개입하면서 일이 커진다. 이에 나유 감독은 성룡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버린다. 이것이 이른바 “성룡 납치사건”으로, 당시 홍콩의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이때 삼합회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뿐더러 홍콩의 액션배우나 무술배우 들도 눈치를 보던 왕우(王羽)가 개입하여 이를 해결해줬고,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성룡은 왕우가 제작하거나 관계한 영화들에 한하여 배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 《미니 특공대》[19], 《화소도》 등이 그 예랍니다

덕분에 성룡은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하게 되고, 여기에서 내놓은 첫 작품이 바로 《사제출마》(1980)다. 《사제출마》는 이전까지의 홍콩 영화의 액션 연출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홍콩의 영화 흥행 기록도 경신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에 등장한 최종 보스이자 무시무시하게까지 보이는 악역이 바로 우리나라의 합기도 원로 황인식이다.

사제출마의 성공 이후 성룡은 이소룡처럼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고, 때마침 골든하베스트사에서도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배틀 크리크》(1980)를 첫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성룡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고,[21] 워낙에 완벽주의와 자유로운 스타일을 중시하는 그에게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의 제작과정[22]은 원칙에 치중하고 제약이 심해 답답한 방식이었다. 결국, 성룡의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난답니다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에 성룡은 홍금보 감독의 《오복성》(1983)에 출연하면서 홍콩으로 복귀, 골든하베스트의 흥행 삼총사 가화삼보의 중심이 되어 성공적으로 재기했고, 《프로젝트 A》(1984)부터는 스스로 감독과 주연을 맡아, 할리우드 체류(滯留) 시절 주변에서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다며 권하기에 접했던 버스터 키튼의 영향을 받은, 과격한 아크로바틱 묘기와 좋은 유머 감각을 결합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성룡이 홍콩으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는 《프로텍터》(1984)라는 작품으로, 홍콩 자본에 미국인 감독 제임스 글릭켄하우스가 감독한 작품이다. 참고로 성룡은 역동적이지 못한 액션에 선정적인 장면까지 삽입된 미국 편집판을 보고 경악해서 드라마 부분을 보강하고 성룡이 자비로 배우들을 다시불러 주요 액션 장면들을 재촬영하고, 편집한 홍콩판 버전인 위룡맹탐을 따로 만들어서 2개월 가량 개봉했다. 아니나 다를까 후에 게봉된 미국판은 악평과 함께 본고장인 미국에서까지 외면받으면 성룡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된다. 당연히 재편집판의 평이 압도적으로 좋은 편이랍니다.

이 당시의 성룡은 경극학교 시절부터 사형제지간이었던 홍금보, 원표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때문에 당시 이 세 명을 합쳐서 가화삼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만, 이들의 영화를 그저 '세 명의 합작품'으로 도매금 취급해버리는 것은 좀 부당한 대우라고 봐야 한다. 물론, 어릴 적부터 절친한 사이였으니 서로가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수는 있지만, 1980년대 초중반 가화삼보의 전성기에도 이들 셋은 연출과 액션에 대해 추구하던 방향성이 꽤나 달랐다. 특히 각자 자신이 주연 내지는 감독을 맡은 작품의 경우는 각자의 색이 매우 뚜렷했답니다.

가령 똑같이 가화삼보가 출연한 프로젝트 A(성룡 감독)와 오복성(홍금보 감독)을 비교해봐도 색이 굉장히 다르다는게 눈에 띈다. 홍금보의 스턴트팀 홍가반은 다이나믹하고 현실적인 액션과 개개인의 특성을 살린 아크로바틱한 모션을 중시한 반면, 성룡의 스턴트팀 성가반은 구성원이 똘똘 뭉쳐 치밀하게 합을 짜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외에도 액션의 리듬감이라든가 구성 등 작은 디테일에서도 둘은 꽤 차이가 나오는 편. 성룡 액션과 홍금보 액션의 차이랍니다

항상 과격한 스턴트와 액션을 선보였기 때문에 이제까지 수많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온몸에 부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고 몇 번은 사경을 헤메기도 했다고 한다. 《프로젝트 A》(1984)부터 성룡은 고소공포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스턴트를 했다. 게다가 작 중 이 낙하장면을 여러 번 보여주는데 매 장면마다 다르다. 즉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걸 여러 번 반복해서 찍었다는 것.[26] 《폴리스 스토리》(1985) 한 편을 찍으면서 척추 골절, 무릎 부상, 고관절 탈구라는 중상을 입었다. 1986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용형호제》를 촬영하던 도중에는 성벽을 점프해서 건너가는 장면에서, 붙잡았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추락, 두개골이 함몰되고 말았다. 성룡은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우측의 청력을 잃었고, 머리부분만 35바늘을 꿰매는 바람에 큰 흉터가 생겼다고 한다. 이 사고 장면은 《용형호제》의 엔딩 크레딧에서 여과없이 나온답니다.

부상을 치료한 후에 성룡은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촬영하여 영화를 완성시켰는데, 부상부위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르고 카메라 앞에 나섰다. 덕분에 영화 도입부에는 데뷔부터 고수해오던 장발을 버리고 짧게 깎은 머리를 선보였는데, 부상 이후 그 부위를 가리려다보니 영화 도입부 이후에는 다시 장발로 돌아간다. 이후 골든 하베스트의 추문회 사장은 성룡의 헤어스타일을 장발로 유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예전처럼 장발보다는 단정한 커트 스타일을 유지 중. 1994년 《홍번구》를 촬영할 때 교각에서 운행 중인 호버크래프트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착지를 잘못하는 바람에 우측 발목이 90도로 꺾이면서 골절상을 입었다. 깁스 자국을 가려야 했기에 운동화 모양을 본떠서 만든 특수 양말을 신고서 촬영을 마쳤다. 이 역시 엔딩 크레딧에서 확인 가능하다

성룡의 작품에서는 스턴트 중의 사고, NG 등을 모아서 엔딩 크레딧에 올리는 전통이 있다.(이는 서구권에서 촬영된 영화에도 남아 있다.) 엔딩 크레딧의 NG 영상을 보면 성룡이 NG를 내면서 촬영 스태프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화기애애한 장면이 나오다가, 성룡이 스턴트를 하다가 다쳐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촬영 스태프가 다치거나 심지어는 사망자가 아닌가 싶은 사람이 실려 나가는(실제로 사망하지는 않았다.) 아찔한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성룡은 이를 통해서 실생활에서는 위험하니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함부로 따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룡이 와이어나 대역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화 마케팅 측면에서의 과장된 수사일 뿐,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룡이 잠시 다치기라도 하면 영화 촬영 스케줄 자체가 밀려버리는데, 이는 영화사의 입장에서 엄청난 손해이며, 출연 중인 다른 배우들에게도 엄청난 피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장면에서 대역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비룡맹장》(1988) 일부 고난도 장면은, 극장에서 보던 관객이라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식겁할 정도로 대역이라는 것이 티가 났다.[29] 다만, 성룡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스턴트라면 대역을 쓰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대역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대역에게 스턴트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성가반 멤버들과 수차례 시도해서 가장 멋있게 나온 장면을 넣는다고 한다.

현재 성룡의 스턴트 팀인 성가반은 홍금보의 홍가반, 원화평의 원가반과 함께 홍콩에서 손꼽히는 스턴트 그룹이며, 보험회사에서는 여전히 그를 요주의 인물로 기피하는 블랙리스트 1순위라고 한다. 딴지일보에서는 그의 이러한 대인배 기질을 "내 몸이 특수효과" 정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네스북에도 현재 살아있는 연기자 중 가장 스턴트 액션을 많이 한 사람(Most stunts by a living actor)라는 제목으로 등재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신종 스포츠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이 인터뷰에서 성룡의 독창적인 액션 시퀀스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파쿠르에는 성룡식의 액션 스턴트 외에도 다양한 동작과 기술이 포함되어 있고, 무엇보다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은 직업적으로 파쿠르를 연습하고 행하는 전문가들이니 일반인은 따라하지 않는 것이 좋다.

2012년 말에는 무려 22년만에 나온 《용형호제》 3편 격의 《차이니즈 조디악》(중국명은 십이생초)에 출연했다. 제목이 《용형호제 3》가 아닌 이유는 1, 2편의 제작판권을 가진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가 문을 닫았고 영화 판권이 미국 워너브라더스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권상우가 조연으로 같이 나왔다. 가발을 쓰고 나온 이 영화에서 나이 예순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무척 힘들어하는데, 이것이 거의 사실상 액션 코미디물로선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사실 이 말은 스케일이 큰 '초대형' 액션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의미일 뿐, 액션 자체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고 본인이 직접 해명했다.

2013년 2월에 개봉한 영화 《차이니즈 조디악》의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찾아 《무릎팍 도사》와 《런닝맨》에 출연해서 아직 녹슬지 않은 그만의 재치와 인생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무릎팍도사》에서 강호동이 "왜 그렇게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하느냐"고 질문하자 성룡의 답변이 예술이었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위험한 연기를 해야만 했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팬들을 즐겁게 해주느냐가 관건이라고 한다. 물론 죽는 게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팬들이 즐거워하면 되니까 그냥 한다고.

결국 2015년 2월 22일 스턴트를 가장 많이 한 배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와 동시에 가장 많은 액션 영화를 제작과 동시에 주연을 담당한 기록으로 하나 더 등재되었다.

- 그의 특징들

- 배우로서의 역할

다른 액션배우들에 비해 연기력이 상당히 출중한 편이다. 슬픔에 괴로워하는 연기에 특히나 강한데, 그런 성룡의 연기력을 제대로 맛 볼 수 있는 영화가 홍금보가 바보 형으로, 성룡이 경찰 동생으로 나오는 《용적심》과, 부하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빠진 진국영 반장 역을 맡았던 《뉴 폴리스 스토리》이다. 그 외에도 《러시아워 3》의 마지막 에펠탑 투 등, 눈물을 머금고 소리치는 장면은 성룡만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코믹 무술 이미지가 커서인지, 진지하게 나온 영화들은 해외 흥행이 신통치 않다. 《중안조(1993)》라든지, 《뉴 폴리스 스토리》, 《신주쿠 사건》 같은 영화들은 평은 괜찮을지언정, 해외 흥행은 참혹했다. 홍콩 흥행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안 좋았다. 《중안조》로 대만 금마장 영화제 및 홍콩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수상한 거와 대조적이다. 《더 포리너》는 평점도 나쁘지 않았고 예산에 비해 상당히 흥행해서 이런 징크스도 깨지는 듯.

물론 액션배우인 만큼 전문적인 파이터나 무술가들만큼 뛰어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무술 실력이 제법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홍콩 영화판이 워낙 무술인들이 많기도 하고, 영화를 찍으면서 여러 무술들을 섭렵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워낙 이미지가 코믹하다보니 되려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뛰어난 운동신경과 무술 실력이 있기에 액션배우로 이렇게까지 활약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 몸이 엄청난 강골인데 안 그랬으면 하술한 사고를 당했을 때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촬영을 하면서 큼지막한 사고들을 많이 당하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하다.

- 감독 및 제작자로서

액션배우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은 바로 감독으로서의 역량. 특히 성룡을 스타덤에 올린 1980년대 중후반의 작품들은 모두 성룡이 감독을 맡았던 작품들이다. 성룡은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기에 접했던 버스터 키튼의 영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키튼의 영향을 받기 전의 성룡의 액션이 단순히 쿵푸에 코믹을 가미하는데 그쳤다면, 이후에는 정교하게 계산된 움직임과 과격한 스턴트를 펼쳐 보는 이들의 탄성을 절로 자아냈다. 일부 미국의 평론가나 영화 매니아들은 성룡의 영화를 접한 뒤에 '버스터 키튼의 진정한 후계자는 미국이 아니라 홍콩에서 나타났다'라는 평을 해주었을 정도랍니다.


수많은 거장들이 그랬듯, 성룡 역시 지나치게 완벽주의를 추구했기에 제작기간은 갈수록 길어졌고, 매해 홍콩 영화의 최대 제작비를 스스로 갱신할 정도로 자본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다.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가 무너진 이유 중 하나로 성룡 때문에 날아간 막대한 제작비를 거론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니... 결국 1980년대 후반에 단단히 맘먹고 제작한 미라클의 흥행이 그저그런 수준에 그치고, 주윤발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 주성치로 대표되는 엽기코믹물이 대박을 터뜨리자 성룡의 행보는 다소 주춤하기 시작한답니다.

이 시기에 성룡이 한 인터뷰에서 "나는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져가면서 영화를 찍는데, 다른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농담 몇마디 하고서도 내 영화보다 훨씬 수익이 좋다"라며 한숨을 쉬었다는 루머가 거의 사실처럼 돌아다닐 정도. 게다가 용형호제 촬영 당시의 부상으로 생명의 위험까지 겪었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1990년대 이후에 성룡이 감독을 맡은 작품은 드물어지고 전문적으로 영화를 공부한 다른 감독들이 성룡의 영화를 감독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 구성이나 재미에 있어서는 성룡 초기작에 영 미치지 못한다. 흥행도 성룡이 직접 감독한 작품에 미치지 못한답니다

전성기 시절의 성룡은 아직 감독 노릇을 하기 전부터 홍콩 영화계에서 감독에게 함부로 간섭하는 배우 중 하나일 정도로 파워가 강했고,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완벽주의자였다.[34]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이후로는 더 심해져서, 자신이 감독이 아닌 영화에서도 사실상 감독처럼 권한을 휘두르는 경우도 잦았다. 때문에 감독과 성룡 사이의 불화나 트러블은 수도 없이 많았다.

가령, 《폴리스 스토리 3》를 찍을 당시, 당계례 감독과 성룡 사이에 갈등이 많았던 터라, 당계례 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 영화 3편을 찍으면서 받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이 작품 하나로 받는다며 투덜거렸고, 《중안조》 촬영 당시에는 황지강(黃志強) 감독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취권2》에서는 무술 연출에 관해 의견이 엇갈려 유가량(劉家良) 감독과 대놓고 싸우다가, 빡친 유가량이 초반부의 격투 장면만 완성시킨 후에 아예 메가폰을 놔버렸다고 한다. 이후 유가량은 《취권2》의 흥행에 고춧가루를 뿌리고자 유덕화를 기용해서 《취권3》를 제작, 동시에 같은 제목의 영화가 개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만 따지자면 되려 《취권3》가 발리고 만답니다

왕정 감독의 전성기에 《성룡의 시티헌터》로 협업한 적이 있었지만, 왕정이 지나치게 다작(多作)하는데다 영화를 대충대충 찍어댄다는 이유로 성룡이 불만을 품어서 촬영 당시에는 사이가 무척 안좋았다. 왕정은 《성룡의 시티헌터》 이후로 이연걸 주연의 《탈출》(원제목은 《서담용위(鼠膽龍威)》)(1995)이라는 성룡을 까는 영화를 만들었다. 장학우가 맡은 룡위란 인물의 기믹을 외모는 이소룡 짝퉁이지만, 성격이나 사생활에서는 누가 봐도 성룡임을 짐작하게끔 만들어놓고 주색잡기와 실제 무술 실력은 별로라는 설정을 집어넣었으며, 한술 더 떠서 아예 스턴트를 직접 한다고 구라치고 대역을 쓰는 장면까지 등장시켰다. 그리고 룡위의 매니저를 맡은 아버지와 매니저 진자강까지 성룡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과 흡사하게 설정함으로서 누가 봐도 한 눈에 알게끔 만들어서 성룡을 조롱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룡위가 부친이 구타당하는걸 보고 분노하여 멋지게 테러리스트를 때려잡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이에, 제아무리 서로 간의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상관도 없는 성룡의 주변인들까지 공개적으로 희화화시킨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많이 받았답니다

성룡의 썬더볼트 촬영 당시에도 진가상 감독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는데, 진가상이 기획한 시나리오에 성룡이 개입해서 시나리오를 수정한 것은 물론이요, 진가상에게 감독을 맡겨놓고서 정작 레이싱 장면에는 진훈기와 당계레를 영입해서 촬영했고, 무술 장면은 홍금보에게 연출을 맡겼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룡은 실베스타 스탤론만큼이나 각본 수정과 제작 과정에 개입을 많이 하는 편이다. 과거 두 사람은 람보 4에 같이 출연할 뻔 했는데, 역시나 각본 문제로 엄청나게 다투다가 성룡이 출연을 거부했다. 원래의 각본대로라면 성룡이 악당으로 나와서 람보 덕분에 갱생하고 람보를 돕는다는 줄거리인데, 성룡은 이 각본을 보고 아시아인 악역이 백인 덕분에 갱생하는 내용은 아시아에 대한 모독이라며 격분했다고. 그런데 어차피 성룡의 요구대로 각본을 바꿨더라도, 제작이나 연출면에서 두 배우가 서로 충돌했으리라는 전망이 압도적이다.

또한 액션영화 제작에만 참여해 온걸로 아는 분들이 대다수지만, 관금붕 감독의 작품도 제작에 참여했는데 완령옥(1992)[39], 장한가(2005)가 대표적.

성룡 자서전 고백 "외도 후 아내 진심 알아"
- 2015.04.06.

중국 출신 배우 성룡(61)이 아내 임봉교(62)에 대한 진심을 털어놨다.

6일 중국 언론매체 신시스바오는 이달 중 발간되는 성룡의 자서전에 실린 성룡부부의 이야기를 전했답니다.

자서전에서 성룡은 무지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언급하며 "임봉교와 만날 때면 항상 친구들을 끌고 갔다. 우두머리가 된 기분 이었다"며 "친구들이 임봉교를 칭찬할 때는 임봉교가 내게 먼저 대시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 옆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웃고있었다"고 임봉교와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당시 성룡과 임봉교의 연예계 위치는 제법 격차가 컸다. 두 사람의 열애소식이 공개된 후 외부에서는 이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답니다

임봉교의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던 임봉교는 출산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 카페에서 성룡과 간단한 결혼식을 올린다.

성룡은 "임봉교가 돈 때문에 나와 사귄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유치했다. 당시 그녀는 연예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고, 돈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1999년 성룡과 전 연인 우치리 사이에 사생아의 존재가 세상에 폭로됐을 때, 성룡은 임봉교의 진심을 알았다고 밝혔습니다.

임봉교는 성룡에게 "설명할 필요 없다. 그녀를 아프게 하지도 말고, 그녀가 우리 가족에게 상처를 주게 하지도 말라" 며 "당신이 나와 아들을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당신을 위해 나서겠다. 지금 당신이 혼란스러운 걸 안다.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난 괜찮다"라고 먼저 위로의 말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으로 임봉교의 진심을 알게 된 성룡은 즉시 자신의 유언장을 "모든 재산을 임봉교에 상속 하겠다"고 수정했다.

임봉교는 1970~80년대 청순한 외모로 인기를 끌었던 대만의 하이틴 스타다. 그는 1979년 영화 '소성고사'로 대만 금마장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나 1982년 성룡과 결혼 후 연예계에서 은퇴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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